<aside> 💡 인종주의는 담론으로 머무르지 않고 현실의 폭력으로 표출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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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에 대한 폭력


<aside> 💬 근대 서구 사회의 인종 담론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 가운데 하나는 ‘흑인’으로 분류된 아프리카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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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가 유지되던 시기에 흑인들은 지능이 부족하나 유순한 어린 아이의 이미지로 묘사되었습니다. 스스로는 바로 설 수 없기에 백인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됨에 따라 흑인을 둘러싼 인종주의적 이미지는 변화했습니다. 특히 흑인 남성은 근육질의, ‘야성미’ 넘치는 이미지로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인텔 회사의 광고. 백인 매니저가 가운데 서 있고, 근육질의 흑인 사원들이 좌우에서 엎드려 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2007년 인텔 회사의 광고. 백인 매니저가 가운데 서 있고, 근육질의 흑인 사원들이 좌우에서 엎드려 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aside> ❓ 육체적 능력에 대한 강조가 왜 인종주의에 해당하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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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남성의 육체적 능력에 대한 강조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성적으로 강인한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의 순수성을 위협한다는 ‘성폭행 신화(rape myth)’의 일부였습니다.

당대 미국 사회는 백인 여성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흑인에 대한 인종적 우위를 각인시키는 방안으로 무고한 흑인 남성들을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한 후, 정당한 사법절차 없이 집단 린치를 가해 살해했습니다. 1955년 에멋 틸(Emmett Till)이라는 14살 흑인 소년은 상점에서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만으로 납치,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은 채 석방되었고, 이는 20세기 중반 흑인 민권운동에 불을 지핀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편 노예제 시기부터 이어져온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문제시되지 않았고, 20세기 중반까지 사법적 정의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¹⁾

빌리 할리데이라는 여성 흑인 재즈 가수는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라는 곡을 통해 나무에 매달려 살해당한 흑인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린치가 행해진 장소에서 한껏 차려입은 백인 군중은 모여 웃으며 사진을 찍었고, 정의를 실현했다는 듯 해당 장면을 엽서로 만들어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희생자의 몸이 백인 중심의 인종적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표시로 활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https://youtu.be/-DGY9HvChXk

린치를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과 이후 린치 현장 사진이 담긴 엽서. Wikimedia Commons.

린치를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과 이후 린치 현장 사진이 담긴 엽서. Wikimedia Commons.

린치에 참여한 백인 군중은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변호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흑인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흑인이 나쁜 사람이라면, 학대는 부당한 일이 아니다. 실은 올바른 일이다.”⁽²⁾

<aside> 💡 프란츠 파농은 이와 같은 백인 사회의 인종주의적 편견과 폭력성을 일찍이 고발한 바 있습니다. 그는 백인에게 “검둥이는 공포,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이며 “모든 도덕과 금지를 뛰어넘는 생식력의 화신”으로 여겨진다면서, 젊은 흑인 남성에게 붙는 ‘힘센’, ‘야성적’, ‘종마’와 같은 이미지의 인종주의적 성격을 비판했습니다.⁽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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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이 상징하는 악과 야만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문명화된 백인의 세계를 습득하고 체화해야 한다. 백인 선망과 검둥이공포증은 하나의 몸에서 나온 두 개의 머리다. 이 둘의 싸움은 존재의 고통을 초래하니, 식민지 인종주의 사회에서 흑인은 이미 고통을 받게 구조화된 존재다. 그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하는 순간 그는 백인에 동화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설 수 없는 폭력적 상황에 처음부터 노출된 것이 흑인이(다).”⁽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