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인종주의는 인종이란 분류 체계 아래 인간을 구별하고, 차별하려는 욕망을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인종을 구분해온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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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는 지나간 이야기 아닌가요?


<aside> 💬 인종차별, 인종혐오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며 불사조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인종주의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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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884년 Pear’s Soap 광고. (우) 2017년 Dove 섬유연제 광고.

(좌) 1884년 Pear’s Soap 광고. (우) 2017년 Dove 섬유연제 광고.

코로나19 이전에도, 인종주의는 이미 일상의 언어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위 두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100년 전 인종주의의 문법은 현재까지도 유효합니다. 인종주의는 문화, 교육, 성, 노동, 과학 등 삶의 다양한 영역 가운데서 은밀하게 차별과 혐오의 맥락을 강화해왔습니다.

은밀한 인종차별이라고 해서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인종차별은 여전히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일방적인 증오에 불과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크리스티앙 들라강파뉴는 인종주의의 밑바탕에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증오”⁽¹⁾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 사람이 어떠한 잘못을 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피부색이 검다는 혹은 노랗다는 이유로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인종주의의 특징은) 미움을 받는 집단의 구성원들에게서 나타나는 심리적 혹은 문화적 ‘결함들’(이) 문제의 그 개인들이 태생적으로 지니는 속성들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한다”⁽²⁾고 믿는다는 데 있다.

인종주의는 단순한 집단적 편견과 구별됩니다. 낯선 이방인을 나와는 다른 존재로 여기며 배척하는 태도 자체는 역사 속에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말을 모르는 외부인을 ‘바르바로이’라고 부르며 구분했고, 고대 중국인들도 ‘중화’와 ‘이민족’을 구분했습니다. 우리 ‘나라’, ‘지역’, ‘학교 등 자신의 집단이 타 집단보다 낫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인식 또한 타자를 생성하고, 우열을 가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종주의가 일반적인 집단적 편견과 다른 이유는 단순히 타자의 열등성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열등성에 “생물학적 차원의 소위 객관적 기원을 부여”⁽³⁾하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도와 이교도를 구분했지만, 이것은 종교라는 문화적 차이에 근거한 것으로서 이교도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경우 그 차이는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인종주의는 백인과 유색인종을 생물학적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차이는 고정되어 있으며, 세대를 이어 계승됩니다.

“어느 인종의 집단적 편견이 법적 권한과 제도적 통제력의 지원을 받을 때, 그것은 인종주의로, 개인 행위자들의 의도나 자아상과 무관하게 기능하는 광범한 체제로 변화한다. …. 이 체제는 사회의 기본 조건이 되어 자동으로 재생산된다. 인종주의는 하나의 체제다.”⁽⁴⁾

그렇기에 이전까지의 집단적 편견이 타자에 대한 개종과 동화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나마 열어두었다면, 근대 인종주의는 타자를 부정하고, 나아가 타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했습니다. 인종주의가 역사적으로 대서양 노예무역과 맞물려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